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수습이냐 저항이냐 === || [[파일:수습대책위원회.jpg|width=350]]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831305_STD.jpg|width=450]] || || 회의 중인 수습대책위원회 위원들 || 무기 회수 중인 시민군 || >(편의상 항쟁파는 '항', 수습위는 '수'로 한다) >수 : 어떠한 명분으로도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항 :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감'''이다. 그렇지만 지금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 >수 : 일단 계엄군을 믿어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계엄군은 정부 당국과도 여러가지 사후처리 문제를 협의해본다고 했다. >항 : 계엄군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우리의 주장,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외쳐댄 요구사항은 한가지도 관철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항복해버리자는 말인가?''' 이것은 투쟁과정에서 죽은 투사들을 매도해버리는 일이다... >---- >해방광주의 투쟁노선을 두고 벌어진 격론 中[*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p343~344] 해방광주의 향방을 두고서 수습위원회 내에서의 갈등은 깊어갔다. 무기 회수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계엄군의 사과 및 재발방지를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의견 대립에 대하여 시민 대부분은 '''회수는 해야하나 무조건적인 반납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수천여 정의 총기가 풀려 청소년들까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이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다만 무기를 반납하는데 있어서 제대로 된 협상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습위 위원들을 통한 무기회수는 계속되었다. 22일에도 수백 정이 회수되었으며, 23일부터는 신부, 변호사, YWCA 회장 등을 포함한 일단의 수습위원[* 이들은 [[조철현]] 신부, 이종기 변호사, 조아라 YWCA 회장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고, 그 때문에 개인적인 신념에 입각하여 무기 회수를 추진하였다.]들이 광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민군을 만나 무기를 회수할 것을 요청했다. 기동순찰대도 광주 지역 내의 지역방위대들을 만나 무기를 반납해달라고 했다.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했지만, 거기에 반발하는 시민군도 많았다. 특히 계엄군 간의 대치 상태가 계속 되고 있던 지역에서는 무기 반납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무기를 반납시키려는 수습위원들과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려는 시민군 간의 실랑이는 눈물 겨울 지경이었다. 화정동 공업단지 부근에서는 근처에 국군통합병원이 있어 계엄군과 대치 중이라 시민군들이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이들은 "'''우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무기 반납은 절대로 못한다. 수습이 되면 우리는 끌려가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습위원 중 하나인 [[조철현]] 신부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라며 애원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민군들은 철수는 하되 무기반납은 하지 않겠다며 수습위원들과 전남도청으로 돌아왔다. 이후 수습위원들이 내의를 사주자며 시민군들을 위해 소정의 돈을 모아 주고, 전남도청 내의 취사반이 식사를 제공하면서 이들은 끝내 무기를 반납하였다.] 어쨌든 25일까지 4,500여 정의 무기가 회수되었다. 그렇지만 무기 회수는 해방광주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로 자리잡았다. 무기를 회수했으니 그러면 이제 어쩔 것인가? 사실 '무기 회수'는 '무기 반납'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로 수습위가 급히 진행한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계엄군이 수습위와의 협상에 있어서 비협조적으로 굴며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을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온건파와 강경파의 충돌은 더욱 첨예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5월 24일 오후 1시 경 도청 상황실에서는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는데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이자 강경파인 김종배가 제시한 요구사항[* ①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②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③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④ 피해 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에 몇몇 수습위원들이 반발하였다. 여기서부터 학생수습위원회 내에서는 온건파 김창길과 강경파 김종배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김창길은 '''무조건 무기 반납 후 수습'''을 주장했고, 김종배는 '''납득할 수 있는 협상을 통한 수습'''을 주장했다. 둘의 갈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의 근본적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내 재야 및 운동권과 관련된 [[윤상원(1950)|윤상원]]과 [[정상용]]은 김종배와 접촉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다. 한편 21일 남동성당에서 모임을 해왔던 재야 인사들도 수습위의 활동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30분에는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도 23일처럼 재야, 운동권, 녹두서점, 들불야학 인사들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며,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궐기대회에 참여한 10만여 명의 시민들은 수습위의 태도가 미온적이고 투항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수습위는 계엄사 측과의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1|협상내용]]을 인쇄하여 배포하거나 기기 설치를 방해하고 [[전기]]를 끊는 등, 궐기대회에 대해 곱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또한 계엄군이 파견한 정보요원들도 집요하게 궐기대회를 방해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청년들은 전투경찰이 쓰던 가스차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해 수습위를 규탄하였다.[* 대회 도중에는 수습위원 중 이종기와 [[조철현]] 신부가 나왔다. 이종기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시민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바람에 불러나야 했다. 반대로 조 신부는 "여러분 나는 성직자지만 총이 있으면 나도, 살상 만행을 저지른 공수부대원을 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말했고 여기에 시민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여기에 시민들도 도움을 주면서 궐기대회는 무사히 치러졌다. 이 대회도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었다. 대회 도중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사회자가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민주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시민들은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재개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자 분수대에 [[전두환]]이라 써진 [[허수아비]]를 데리고 와 [[https://namu.wiki/w/%ED%8C%8C%EC%9D%BC:%EC%A0%84%EB%91%90%ED%99%98%20%ED%97%88%EC%88%98%EC%95%84%EB%B9%84%20%ED%99%94%ED%98%95%EC%8B%9D.jpg|화형]]에 처했다. 전두환 허수아비가 불에 활활 타자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열렬히 환호했다. 이 장면을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취재 및 촬영을 하였다. 대회는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2|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게 고함 -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3|껍데기 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4|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6|국민에게 드리는 글 - 광주시민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7|시국선언서 -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59|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 - 윤공희 대주교]] 저녁에는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다시 무기 반납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김창길과 김종배는 팽팽하게 대립했고, 역시나 둘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렸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기를 반납하자는 기세를 보이자 시민군 중 하나였던 [[https://brunch.co.kr/@1980may18/2|박남선]][* 박남선은 평범한 사업가로 일하고 있었으나, 5.18 초기에 동생이 계엄군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해 반 죽은 채로 병원에 실려오는 등 계엄군의 여러 만행을 보자, 분개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5월 21일 전남도청 집단발포 이후 시민군의 무기 탈취에도 참여하였고 항쟁 당시 시민군이자 강경파로 활동하였다. 이 일로 5.18 진압 후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82년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현재는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오월 그날> 등의 책을 쓰는 등 광주에 있었던 일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은 분개하여 의자를 집어던지서까지 무기 반납에 반대하였다. 일부 온건파 학생들은 무기 반납을 거부하는 강경파를 보고 수상하다며 간첩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회의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온건파 학생 몇 명이 수습위원회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리하여 학생수습위원회 기구는 일부 변화를 거쳤다.[* 위원장 : 김창길 / 부위원장 겸 내무위원장 : 황금선 / 부위원장 겸 장례 담당, 대변인 : 김종배 / 상황실장 : 박남선 / 경비 담당 : 김화성 / 무기 담당 : 이경식 / 홍부부장 : 허규정] 그러나 온건파와 강경파 간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와 김종배를 비롯한 강경파가 각각 위원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경파가 모르는 사이 전남도청 아래에 위협용으로 보관 중이었던 TNT와 다이너마이트가 군 측에 의해 제거되었다.[* TNT와 다이너마이트는 전남도청 지하 무기고에서 보관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9명의 시민군이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그 중 광주제일교회와 연결된 사람이 있었다. 헌데 그 광주제일교회의 부목사가 상무대에서 [[군목]]으로 일하고 있어서 군 측과 접촉이 되었다. 군 측과 경비 측은 폭발 위험성을 우려하여 전문가를 투입하기로 합의했고, 24일 오후 5시 경부터 25일 오후 1시까지 병기근무대 기술문관으로 일하던 배승일이 투입되어 수류탄 신관 279발, 최루탄 170발, 다이너마이트 2,100개의 뇌관을 제거하였다. 제거 이후 배승일은 돌아갔고, 경비들은 뇌관을 한데 모아 보관하였다. 헌데 이 일은 당시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도 알고 있었다고 당시 경비를 섰던 몇몇은 증언하고 있다. 한편 뇌관을 제거한 배승일은 5.18 이후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으나, 2006년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진압책임자들의 서훈이 박탈당할 때 자신도 훈장을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소송을 걸어서 2007년 서훈취소를 철회받고 훈장을 되찾았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2823|#]]] 5월 25일이 되자 계엄군 측 정보요원들의 공작도 심해져갔다.[* [[김영택]] 기자에 따르면 5월 25일 새벽에 40대 즈음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도청 상황실을 찾아와서 전일빌딩 경계강화를 위하여 실탄과 총을 더 지원해달라고 했다. 이에 수습위원들은 차라리 시민군을 더 증원해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적잖이 당황해 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자신이 평범한 시민군이 아니라 시민군으로 위장한 첩보원임을 자기 스스로 드러낸 꼴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침 8시에 발생한 이른바 '''독침사건'''이다. 시민군 중 하나였던 장계범(23)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독침이다"라고 소리치곤 쓰러졌고, 옆에 있던 정향규(23)라는 사람은 그를 도우려고 상처에 입을 갖다댔다가 역시 쓰러졌다. 놀란 사람들이 둘을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이 사건이 터지자 몇몇 사람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간첩" 운운하며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중에는 계엄사에서 보낸 정보요원들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장계범은 자신이 방심한 사이 독침을 맞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 치료도 받지 않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의 진단서에는 의식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약물중독에 대한 이상증세 또한 없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같이 실려온 정향규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잡혀 취조를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장계범과 짜서 이 사건을 일부러 조작했다고 자백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계엄군 측이 벌인 조작사건'''으로 결론내려졌다.[* 나중에 5.18 진압 이후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군들이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장계범이 나타나 자신들의 인적사항을 세세히 알려주었다고 한다.] || [[파일:장갑차에 올라와 있는 시민군.jpg|width=500]] || [[파일:복면을 쓴 시민군.jpg|width=360]] || || 장갑차에 올라와 있는 시민군[* 참고로 이 사진에 나온 시민군의 신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왜곡으로 유명한 [[지만원]]이 그를 '''제1호 광수'''로 지목하며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북한군 개입설]] 유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박하고자 그의 신원을 찾기 위한 활동이 벌어졌는데 영화 [[김군(영화)|김군]]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복면을 쓴 채로 차량에 앉아 총을 든 시민군[* 이 사진에 나오는 2명의 시민군 중 하나는 당시 양복점 기능공이었던 임성택(17)이다. 그는 5.18 초기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 분노하여 시위에 참여했고, 시민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찍힌 사진이 [[지만원]] 같은 극우인사들로 인해 [[간첩]]으로 몰리는 것에 분개하여 35년 만에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였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1636.html|#]]] ||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어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하였겠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광주 사태의 수습을 위해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와 군이 인정'''을 하고, '''겸손한 사죄의 표지'''를 하셔야 할 것이고,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 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 >윤공희 대주교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낸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77|호소문]] 中 >이제 우리는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 돼지처럼 입을 그릇에 처박고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치고 박고 개 잡듯이 끌고가며,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걸으며 인간답게 살려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투신해야 한다. 지난날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부마사건]]으로 숨진 사람들은 [[박정희|유신괴수]]의 죽음으로 피의 값을 받았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우리 시민들의 피의 값도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결단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비굴하게 짐승처럼 천한 목숨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인간다운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 >김상용 신부의 5월 25일자 미사 中[*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정남(1942)|김정남]], 「생활성서」 2002년 12월호, p46~47] 오전 10시에는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들이 YWCA 2층 총무실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여기서 [[윤상원(1950)|윤상원]]과 [[정상용]]은 수습위원회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투쟁조직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은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싸움을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여기에 재야 인사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몇몇은 민주화를 위한 계속적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서 이들의 제안을 지지했으며, 몇몇은 지도부가 있다하더라도 계엄군의 압도적 화력 아래 분쇄되어 많은 희생이 생길 것을 염려해 반대한 것이다. 오후 2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성당에서 재야인사들이 다시 모였다. 재야인사들은 2시간 동안 수습위와 사태 수습의 향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기존의 수습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때의 수습위원회는 이종기, 명노근, [[조철현]] 비오 신부만 남고 전부 이탈한 상태여서 재야인사들이 참여하자 보다 강경한 태도를 띠게 되었다. 새로 구성된 수습위는 곧바로 재야인사 중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안한 4개 항[* ① 이번 사태는 정부의 과오로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② 사죄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③ 모든 피해는 국가가 보상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④ 어떠한 보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을 토대로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1|「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25일 밤 11시 경에 김성용을 대변인으로 하여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의 이름으로 이 문건에 서명하였다.[* 이것은 이날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왔다 간 후에 발표한 '광주시민에게 고하는 특별담화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최규하의 광주 방문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오후 3시에는 도청광장에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참가인원은 5만여 명으로 저번에 비해서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각 동별로 피켓을 들고 모여서 분수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궐기대회 도중에는 많은 성명서들이 발표되었는데, 특히 시민군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어떻게 21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는지를 잘 설명해주었다. 또한 주최 측을 통해 피해상황이 중환자 520명, 경상자 2,170명, 사망자 70여 명으로 파악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런가하면 [[미군]]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미군]]의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이에 대해서도 후술하도록 하겠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2|광주시민 여러분께 - 광주시민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3|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 시민군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4|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 - 광주사태수습위원회]]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5|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 전남,광주시민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6|전국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글 - 광주시민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7|국민에게 드리는 글 - 광주 민주학생 일동]]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68|전국 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 - 광주 민주학생 일동]] 이 날에도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어졌다. 새벽에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은 온건파를 규합하여 일방적으로 무기 반납을 결정하였다. 여기에 김종배와 박남선은 크게 반발했다. [[윤상원(1950)|윤상원]]은 둘을 만나 서로의 힘을 합치기로 하였고, 학생수습위 내의 강경파 인사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7시 경 윤상원을 비롯한 강경파는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온건파인 김창길은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며,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냐"면서 비난했다. 이에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언쟁이 벌어졌다. 김창길은 "무기를 놓고 당장 도청을 떠나자"고 말했고, 윤상원은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총을 놓지는 못하겠다"면서 버텼다. 결국 김창길은 학생수습위원장 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빠져나갔고, 온건파 인사들도 대열을 이탈하였다. 결국 오후 10시 강경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투쟁위원회(학생시민투쟁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위원장 : [[김종배(정치인)|김종배]](26)[* 전남 강진 출생으로 [[조선대학교]] 무역학과에 다니다가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계엄군이 물러나고 나서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맡으며 활동했으며, '강경파'의 대표 인사로서 온건파인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과 충돌하였다. 이후 윤상원과의 접촉을 통하여 새로 만들어진 항쟁지도부의 대표가 되었다. 이 일로 그는 5.18 이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풀려나고 현재는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 업무 총괄 내무 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26) - 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 업무 외무 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30) - 계엄사 협상 업무 대변인 : [[윤상원(1950)|윤상원]](29) - 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공식적인 대외 발표 업무 상황실장 : 박남선(26) - 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공식적인 대외 발표 업무 기획실장 : 김영철(32) - 지도부의 제반 업무 및 기획 기획위원 : [[http://www.bonhd.net/news/articleView.html?idxno=2700|이양현]](30)[* 이양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일찍이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71년에는 [[정상용]]과 같이 전남대학교 교련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는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5.18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한겨레]] 광주지사장을 역임하였다.] - 기획업무 기획위원 : 윤강옥(29)[* [[전남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제적당한 적이 있었다. 5.18 이후에는 5.18민중항쟁동지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했고,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광주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 기획업무 홍보부장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8517.html|박효선]](26)[* [[전남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광주지역 문화패인 '광대'를 이끌었고, [[연극]]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5.18 이후에는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5.18을 다룬 연극들을 발표하였고 이를 위하여 극단 '토박이'를 만들었다. 1998년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 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민원실장 : 정해직(29)[* 5.18 당시 보성 노동초등학교 광곡분교 교사로 일하다가 항쟁에 참여하였다. 5.18 이후에는 항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사에서 해직당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도 힘을 보탰다. 민주화 이후에는 전교조 활동으로 여러 번 다시 해직되기도 한 그는 5월항쟁동지회장과 [[5.18 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하였다.] - 제반 대민업무, 장례업무 조사부장 : 김준봉(21)[* 5.18 당시 도청 내 조사반에서 일하다가 항쟁지도부에 들어왔다. 5.18 이후에는 5월항쟁동지회에서 활동하였다.] - 치안질서 위배자 조사 보급부장 : 구성주(25)[* 5.18 당시 지역방어활동에 참여하다가 도청으로 들어와 활동했다.] - 식량 조달 및 식사공급 || 민주투쟁위원회는 본격적인 항쟁지도부의 첫 출발이었다. 이들은 제일 먼저 수습활동으로 인하여 약해진 시민군과 외곽경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리하여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서 외곽경비를 보충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도청 지하 무기고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계엄군과의 협상을 진척시켜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 다이너마이트는 이미 해체된 후였지만 항쟁지도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은 시민의 합동장례식에 대한 안건이었는데, 5월 28일에 '도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 또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시내버스 정상 운행, 공무원 및 경찰 비무장 근무, 상가 및 시장 정상 운영, 지역 언론 정상 가동, 동네별 피해상황 파악, 유류 사용 통제, 시민군 재편 등이 제안되었다. 한편 시민군에서는 대학생들을 일원으로 모으는 홍보활동을 했다. 여기에 7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시민군과 수습위, 항쟁지도부를 돕거나 도청과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YWCA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투입되었다. 물론 일반 시민들 중에서도 시민군에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계엄군과 정부 측에서는 구체적인 진압작전을 이날 확정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육군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진압작전을 마련하고 시행 날짜는 5월 27일로 정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하였다. 신군부가 정한 진압작전을 국방부 장관 [[주영복]]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보고를 하면서 광주에 내려가 볼 것을 종용했고, [[전두환]]도 광주에 내려가라고 권했다. 이를 최규하가 받아들이면서 오후 6시 경 군인들과 정부 인사를 대동하고 광주에 나타났다. 하지만 최규하는 광주에서 와서 광주시민들이나 수습위원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났을 뿐이었다.[* 당시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인 김순현의 증언에 따르면 최규하는 진압작전 시에 사망자가 얼마나 나올지 물었다고 한다. 김순현이 200여 명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자 최규하는 자신이 직접 도청으로 가서 담판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와 동승한 각료들이 납치, 북괴의 침입 등을 운운하며 그를 만류하여 결국 도청 방문은 무산되었다. 대신 그는 담화문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그가 광주에서 녹음한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70|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물론 이 담화문에는 광주의 진실은커녕 군을 치하하고 진압의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등의 훈시 정도 밖엔 없었다. 한편 미국 국방부는 23일부터 국군 20사단 병력이동 승인을 발표했고, 국내외에서는 미국이 끌고 온 [[항공모함]]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 항공모함은 미7함대 소속 [[https://en.wikipedia.org/wiki/USS_Coral_Sea_(CV-43)|코럴시호]](USS Coral Sea)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우리들을 도우려 왔다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이 배가 온 것은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국 국민들을 대피시키고 북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Vv2nVHa0|관련 뉴스 영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